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행주 기씨 (문단 편집) === 기찬 이후 === [[조선]] 중기의 인물인 12세 기찬(奇襸), 1444~1492)[* 시호는 정렬(貞烈, 정렬공). 넷상에는 기찬홍(奇禶弘)이라는 표기도 있으나 [[http://kostma.aks.ac.kr/FamilyTree/|만가보]]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형인 기유(奇裕), 동생들인 기저(奇褚), 기주(奇裯), 기정(奇禎)도 모두 외자 이름인 걸로 보아 오기인 것으로 보인다. 여담으로 이름인 찬은 넷상에 禶(제사 이름 찬)과 襸(고운 옷 찬)의 2가지 표기가 있는데 두 글자가 너무 비슷해서 헷갈린 것으로 보인다. 일단 형제들의 이름과 비교해 봤을 때 襸(고운 옷 찬)쪽이 맞는 걸로 보인다.]은 3세 4형제 중 3남인 기필선의 후손으로 행주 기씨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. 기찬은 조선 [[성종(조선)]] 대의 문신이며, 13세에 해당하는 아들 5형제로 [[파평 윤씨]] 소생인 기형(奇逈), 기원(奇遠)과 [[안동 권씨]] 소생인 기괄(奇适), 기진(奇進), 기준(奇遵)을 남겼다. 이 중 5남 기준은 [[조광조]]의 제자였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도 스승과 같은 파벌이었고 사림파의 일익을 담당하다가 결국 [[기묘사화]]에 휩싸여 자결하였고 거의 전 가문이 지방으로 도피하게 되었다.[* 이때 기씨뿐만이 아니라 많은 가문들이 피난을 갔는데 사림파의 수장이었던 조광조의 가문인 [[한양 조씨]] 또한 말할 것도 없이 지방으로 대거 피난을 갔다.] 사후 사림파가 복권되면서 추증된 시호는 문민(文愍, 문민공). 13세 차남 기원(1481~1522)의 후손 중에는 성리학자로 이름을 드러낸 호남의 은덕군자(隱德君子) 금강(錦江) 기효간(奇孝諫)과 송암(松巖) 기정익(奇挺翼)이 있으며, 조선 후기 성리학의 6대가로 일컬어지며 노사학파(蘆沙學派)를 만든 기정진(奇正鎭)도 있다. 그가 강학하던 전라남도 [[장성군]] 진원면의 정사(精舍)인 담대헌(澹對軒)은 1924년 후손들이 중수하여 고산서원(高山書院)이라는 편액을 걸었다. 13세 4남 기진(1487~1555)의 네 아들 중 차남은 성리학자로서 퇴계 [[이황]]과의 [[사단칠정논변]]으로 유명한 인물인 고봉(高峯) [[기대승]](奇大升, 1527~1572, 14세)이 있었다. 13세 5남 기준(1492~1521)은 1남 1녀 중 외아들인 가구(可久) 기대항(奇大恒, 1519 ~ 1564)이 있었다. 기대항은 기묘사화로 인해 교살당한 기묘명현 기준의 아들이었기에 [[사림파]]의 동정을 사서 빠른 출세를 하였다. 높은 관직에 오른 뒤에는 [[명종(조선)]]의 교시를 받아 심의겸 등과 함께 당시 권세를 누리던 외척 [[이량]] 일파의 탄핵을 진두지휘하여 그를 몰락시키는 데 기여하였다. 이에 사림들을 보호한 공이 있다 하여 정견(貞堅, 정견공)이라는 시호를 받았다. 허나 [[조선왕조실록]]에 의하면 [[관찰사]]나 [[수령]] 시절에는 횡포를 많이 부려 백성들이 원망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등 민간의 평은 영 좋지 못하다. 그리고 기대항의 손자 16세 [[기자헌]](1562 ~ 1624)은 [[광해군]] 시절 영의정까지 진출하였다. 기찬 대 이후로 조선 중기의 유력 명문가 중 하나가 되었지만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행주 기씨 집안에서 이렇다할 관직을 배출하지 못했다. 이는 대한제국, 일제강점기, 대한민국 건국 초기에도 마찬가지였지만 [[기동민]]이 20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행주 기씨 최초의 국회의원이 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